이런 저런

세월의 역사속에서 빛 바랜 옛 모습

정신똑띠챙기! 2011. 11. 6. 23:59

세월의 역사속에서 빛 바랜 옛 모습


↑ 서울 삼각지 로타리 1968



↑ 인천 중국인촌 1968



↑ 파주 용주골 1968



↑ 양양 남해항 1968



↑ 영주역 1969



↑ 부산 영도다리 부근 1970




↑ 안동 牛(소)市場 1971



↑ 구례 피아골 1973



↑ 서울 종로 2가 1974



↑ 강릉 선교장 1980



↑ 성철스님 1987

 
↑ 1930년대 서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서 통학

 배재고보 학생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전시를 기획한 김종헌 관장은 “교복을 차려 입은
학생들이 근대도시로 변모해가던 경성의 풍경을
바꾸는 데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이
주목된다”며 “당시 앨범에 담긴 풍성한 학창 생활의
면면들은 입시 탓에 무미건조해진 요즘 졸업 앨범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진들은 오는 23일 개막하는 이 박물관의 개관 2주년
기획전 ‘졸업앨범-배재학당 졸업앨범 125년의 이야기’
전(내년 7월23일까지) 에 선보일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1943년 일본식 속옷 훈도시를 입고 강가에서 수영하다 찍은 기념 사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 1933년 경주 수학여행을 찍은 사진들.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등을
                       뒤덮은 학생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 1936년 졸업앨범 사진. 학생들이 서로 엎드린 자세로 어우러져 배재학당의
                              교표 이미지를 만들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 1920년대 화학 수업 광경.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 1920년대 교정에서 테니스를 치거나 실내에서 탁구를 치는 모습이다.




↑ 1936년 찍은 웅변부 동아리의 연습 광경. 각양각색의 자세로
연사 흉내를 내는 모습이 재미있다.


↑ 1933년 배재고보의 어느 점심시간. 예나 지금이나 교실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건 즐겁다.



 ↑ 70년대초 대구…넝마주이 소년((( 1970년대초만 해도 대구 지역
곳곳에는 넝마주이나 아침에 밥을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거지,
허잡스러운 물품을 팔러다니는 상이군경 등이 많았다.
블록 담장에 지친 몸을 기댄 채 해바라기를 하며 생모를 생각하는
듯 어린 넝마주이의 표정이 더없이 서럽기만 하다.2"

70년대초 대구…넝마주이 소년((( 1970년대초만 해도 대구 지역
곳곳에는 넝마주이나
아! ㎰ 밥을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거지, 허잡스러운 물품을 팔러다
니는 상이군경 등이 많았다.
블록 담장에 지친 몸을 기댄 채 해바라기를 하며 생모를 생각하는듯
어린 넝마주이의 표정이 더없이 서럽기만 하다.



↑ 60년대 대구 물장수 아저씨((( 60년대만 해도 대구의 상수도 보급률은
형편 없었다.
변두리 달동네 주민들은 매일 공동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거나 매일
동네를 방문하는 물장수 아저씨한테 물을 사먹어야만 했다.
이때는 드럼통이 급수통으로 이용됐다.




 ↑ 60년대 개구쟁이들의 신천나들이((( 60년대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징검다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한 아이(왼쪽에서 네번 째)가 갓난애기를
등에 업고 돌보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4"

60년대 개구쟁이들의 신천나들이((( 60년대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징검다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한 아이(왼쪽에서 네번 째)가 갓난애기를
등에 업고 돌보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





↑ 구름과자를 아시나요?((( 반세기 전만 해도 '국민학교' 앞은 불량 군것질거리의
집산지였다.
특히 뜨겁게 달궈진 철통 안에 설탕을 집어넣으면 금세 양철통에서 구름이
피어올랐다.
'구름과자'로 인기가 높았던 솜사탕 제조기는 척박한 일상을 살던 아이들에겐
꿈결 같은 것이었다.5"





 
↑ 엄마 제가 이 잡아 드릴께요((( 공중위생 시스템이 전무했던 60년대에는
이와 벼룩, 빈대가 주민들의 몸 곳곳에 기생했다. 볕이 좋은 날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판잣집 앞에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이를 잡아
주고 있는 딸의 눈매가 더없이 훈훈하기만 하다.6"

엄마 제가 이 잡아 드릴께요((( 공중위생 시스템이 전무했던 60년대에는
이와 벼룩, 빈대가 주민들의 몸 곳곳에 기생했다.
볕이 좋은 날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판잣집 앞에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이를 잡아주고 있는 딸의 눈매가 더없이 훈훈하기만 하다.

 


↑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 '준공 직전의 경북도청'((( 준공 직전
공사 중인 경북 도청 창문 턱에 올라가 손을 잡고 놀고 있는 동네
개구쟁이들. 도청은 옛 중앙공원 자리에서 1966년 4월1일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8"

















↑ 1968년 안양역 모습



↑ 60년대의 부산 자갈치시장.


↑ 60년대 자갈치 아지매들의 화사한 모습.


↑ 2.28당시 경북고생들과 대구고생들이 경찰에 검거되어
끌려가고 있는 모습


↑ 1960. 3. 15 마산여고생 시위대에 소방차가 물을 쏘고 있다


↑ 2·28직후 여학생들이 시위하고 있는 모습



↑ 이순재와 남정임의 한창때 모습.
최인현 감독이 1969년에 발표한 영화 "춘원 이광수"의 한 장면.

춘원의 젊은시절 역을 맡은 "이순재"와 그의 아내 허영숙 역을
맡은 "남정임"이 극중 연애하던 시절의 한창 때 모습이다.

"남정임"의 눈물이 고인 듯한 눈망울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진이다.

이 영화에서 중년 이후의 춘원과 허영숙 역은 "김진규"와 "조미령"이
맡아서 열연한다.

"이광수"의 일대기를 "최인현"감독이 당대의 톱스타를 더블
캐스트로 기용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영화화하였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 /font>
↑ 60년대 극장 쇼무대의 트위스트 김  1960년대 극장 쇼 공연사진.
"트위스트 김"과 한 사람이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고 있는 있는데
저 사람이 극장쇼의 전설이라는 "체리보이"이다.
1968년경 부산의 극장무대로 추정되는 사진.



↑ 60년대 통금위반자들. 5.16 이후 통금위반자를 서울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 임시 수용하고 있는 모습



↑ 노래하는 추억의 스타 "김승호"




↑ 1960년대 아리랑 꽃신 ( 5cm ~ 7 cm )

1960년 주한미군 이나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기념품으로 사간 아리랑 모형 꽃신 선물세트. 소형 남녀 고무신 한 켤레로 규격은
마주 작은 모형이다.

신발 안에는 KOREA라고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글씨와 함께 두루마기의
남자와 한복을 입고 춤을추는 여자가 그려져 있다.



↑ 1962년 강화대교 기공식.

5.16 직후에 갑곶나루에서 거행된 강화도 육로개설 기공식에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참석하여 치사를 하고 있다.

이 강화대교는 오랜 난공사 끝에 1970년 준공된다.






▲ 1951. 4. 20. 대구 근교 훈련소에 신병 입대자들이 입소하고 있다.



▲ 1951. 5. 15. 대구 근교 훈련소에서 신병들의 수료식이 열리고 있다.



▲ 1951. 5. 15. 대구 근교 훈련소, 수료식을 마친 신병들이 부대배치를
받고 있다.



▲ 1951. 5.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가고 있다.



▲ 1951. 5. 20. 지게부대.



▲ 1950. 7. 7. 기마대 행렬.


▲ 1950. 7. 29. 주야간 전투에 지친 국군 병사들이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고 있다.



▲ 1951. 5. 29. 평화로운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



▲ 1951. 5. 26. 마을의 평화를 깨트리는 전차가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 1951. 9. 11. 피난길에 만난 형과 아우.